천도교 임시본부

천도교

전 인류의 생맥 시천주(侍天主) 진리에 의한 인내천주의와 사인여천윤리로
양대 모순사상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초극해서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고 분열된 세계를 통일하여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輔國安民) 달성하자.

천도교의 종지와 이상 천도교의 출현과 연혁 천도본체의 기본원리 천도교의 운동약사

천도교(天道敎)의 백년사(百年史)는 천도교의 목적인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대성업(大聖業)을 성취하여 선천오만년(先天五萬年)에 노이무공(勞而無功)하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성전(聖戰)이며 혈투사(血鬪史)이다.

선천(先天)의 낡은 세력의 포학한 박해 또는 물질문명제국(物質文明諸國)의 모든 침략 등 전후좌우의 침해 속에서 오직 천의(天意)와 천명(天命)에 의하여 후천개벽운(後天開闢運)을 순응하고 하느님의 성업(聖業)을 완수코자 네 분 스승님을 비롯하여 백만(百萬)의 신도들은 성혈(聖血)을 뿌렸으니 이것이 거름이 되고 이것이 씨가 되어 오천만의 우리 민족은 시천주정신(侍天主精神)으로 하나로 뭉쳐서 나아갈 뿐 아니라 전세계(全世界)가 통일의 결실을 맺을 것을 확신한다.

이에 천도교 백이십년 간의 운동사(運動史) 가운데서 그 중요한 것을 들면 갑오혁명, 갑진혁신, 기미독립, 무인멸왜기도, 을묘통일운동의 5대운동(5大運動)이니 이 5대운동의 정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신사(精神史)로 보아서 신인분리(神人分離)의 피안적신앙(彼岸的信仰)은 막이 내려졌고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자신적신앙(自神的信仰)의 전기(轉機)를 일으킨 것.

둘째 도덕적으로 보아서 선천(先天)의 그릇된 가치관(우주관, 인생관, 사회관, 도덕관)에 구속된 인류를 풀어내어 후천(後天)의 시천주(侍天主)의 새 가치관을 이 세상에 정립시키는 운동을 일으킨 것,

셋째 사회제도적으로 보아서 지금까지 선천(先天)의 그릇된 제도 아래 인간각자의 정신심층(精神深層)에 깔려있는 원한(怨恨)을 풀어서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새 윤리를 제정할 단서(端緖)를 지은 것,

넷째 범위와 계단적으로 보아서 이 운동이 비단 우리민족에 국한한 것이 아니고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운수(運數)는 천의(天意)와 천명(天命)에 의하여 그 씨가 한국에서 뿌려졌고 한국에서 자라나서 세계에 꽃이 되고 열매가 맺어지는 계단운동(階段運動)을 이루어 놓은 것이다.

이상 네가지 의의와 요소를 가진 운동이므로 희생을 겪으면서도 전진운동(前進運動)에 열을 가하였다.

갑오혁명운동
(甲午革命運動)
갑오혁명운동은 포덕35년(서기1894년)에 일어난 운동이다.

그때에 우리 한국은 세계의 은둔국(隱遁國으)로 외국세력이 비로소 앞을 다투어 침입해 왔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서양의 물질문명을 흡수 소화하여 근대국(近代國)으로 발전하여 보려는 개화당(開化黨)이 있었고 봉건제도를 그대로 고수하려는 보수당(保守黨)이 있어서 서로 대립투쟁에 영일이 없었다. 개화당은 배외사상(排外思想)이 강하고 봉건잔재를 유지하려는 보수당에 밀려 추방 또는 망명의 길은 걸었다.

보수세력에 의해 유지되는 정부는 모든 악폐가 많고 정령(政令)은 조변석개(朝變夕改)하여 탐관오리의 가렴주구(苛斂誅求)와 귀족계급의 발호(跋扈)로 인하여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정국은 혼란을 거듭하였다. 이때에 동학(東學)이 각지(各地)를 통하여 포교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을 본 정부는 크게 놀라 동학에 대한 탄압이 심하였다. 중일로(中日露) 세 나라가 우리 한국을 자기세력판도 속에 넣기 위하여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때에 우리나라 정부와 정치인들은 자주적으로 일본의 북진정책 로서아의 남진정책 중국의 보수정책을 사전에 방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친일당(親日黨) 친로당(親露黨) 보수당(保守黨)이 각자가 외래세력을 등에 업고 정권의 쟁탈(爭奪)을 연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의에 불타고 민생들의 사중구생(死中求生)의 염원을 명확히 파지(把持)하며 후천개벽운을 순응하고 선천(先天)의 낡은 가치관에 도전한 동학은 민족적모순(척양척왜斥洋斥倭)과 계급적모순(제폭구민除暴救民)을 함께 극복하기 위하여 혁명의 대의(大義)로 격문을 선포하고 한국 중남부를 중심으로 일제히 봉기하니 그 수가 누백만(累百萬)에 달하였다. 이때에 정부에서 크게 놀라서 관군을 각지에 보내어 싸웠으나 관군은 각처에서 연패하고 동학당(東學黨)은 승승장구로 남한일대를 점령한 후에 공주감영까지 함락의 위기에 직면하게 하였다.

이것을 본 정부는 도저히 항거하지 못할 것을 알고 급거히 청국(淸國)에 원병을 청하였다. 청국은 속국의 내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한국으로 급거출병하여 양군의 합세로 동학당을 공격하는 중에 일본에서는 청국출병은 천진조약(天津條約)에 위반이라는 핑계로 또한 한국에 출병하다. 이때부터 세 나라 군사가 합세하여 포위공격을 함으로 동학당은 일년여(一年餘)를 항거하다가 부득이 후일을 기약하고 혁명의 봉화는 종식을 고하게 되었다.

그러자 중일 양국은 이 출병으로 인하여 마침내 청일전쟁(淸日戰爭)이 발발하게 되고 갑오동학운동(甲午東學運動)은 청일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동학혁명운동의 희생자만도 오육십만에 달했는데 운동이 종식한 후 수삼년 동안에 투옥치사한 수는 부지기수의 참상이었다. 그러나 시천주(侍天主)의 새 가치관을 정립하려는 새 세력은 어떠한 압력으로도 제어치 못하는 것이다. 이 동학당은 또다시 지하비밀결사로 들어가서 십년동한 그 기회를 엿보고 오직 포덕(布德)에 전력하였다.

이 운동의 영도자는 천도교2세교조 최해월신사(崔海月神師)요 북군통솔은 천도교제3세교조 손의암성사(孫義菴聖師)요 남군통솔은 전봉준장군이었다.

갑진혁신운동
(甲辰革新運動)
갑진혁신운동은 갑오혁명운동 이후 십 년 만인 포덕45년(서기1904년)에 일어난 운동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중일마관조약(中日馬關條約)을 맺은 후에 중국의 기반(羈絆)을 벗어나서 독립국가의 자격으로 각국과 통상조약도 체결하고 영공사도 교환하여 열국(列國)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정치와 교육제도를 개선하고 민생과 경제문제도 정리개선 하였으나 신구교체기(新舊交替期)에 국력의 충실은 도모키 어려운 때에 봉건잔재의 발호로 갖은 혼란이 팽창하였다.

국내 정국이 착잡한 가운데 동양정세는 급속도로 변하여 로국의 극동정책과 일본의 대륙정책이 상충되면서 우리나라에 두 세력이 침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로당과 일당이 생기고 필경은 로서아가 북한에 군사기지를 설치하게 되니 이로 인하여 일로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에 천도교3세교조 손의암성사는 일본에 망명하여 교중청년(敎中靑年)을 일본으로 입국시켜 신교육으로 양성하면서 보국안민의 대업을 성취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러한 도중에 일로전쟁의 발발의 기운이 농숙(濃熟)하게 되었다. 의암성사는 이 전쟁의 목적은 만주와 조선인데 일본이 승리하게 되면 만주와 조선은 일본의 세력권 내로 로서아가 승리하면 로서아의 세력권 내로 진입하게 됨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그러므로 이때에 전민족이 합심하여 절대 엄정중립(絶對嚴正中立)을 지키고 자체를 견고히 하여 외환을 막지 않으면 국가멸망을 면치 못할 것을 간파하시고 이 전쟁의 목적과 전쟁 뒤에 받을 영향을 들어 정부에 치서하였으나 국가흥망이 이 전쟁에 있는 줄은 생각하지도 않고 본래 탄압하던 동학당(천도교)이 다시 일어난다고 크게 놀래서 모략과 탄압을 더한층 심하게 하였다.

그러나 손의암성사는 초지일관으로 구국안민(救國安民)이 재차일거(在此一擧)라는 명령을 내리시니 이해 8월 26일에 전국교도(全國敎徒)가 일시에 단발흑의(斷髮黑衣)로 일어나서 그 수가 수백만이 되었다. 이 혁신운동(革新運動)은

첫째 독립기초견고

둘째 정부개혁

셋째 군정재정정리(軍政財政整理)

넷째 인민의 생명재산 보호 등 네 가지 강령(綱領)을 내세우고 정부에 대한 탄핵연설 시위운동과 탐관오리의 파면축출 무명잡세혁파(無名雜稅革罷) 등 행정부면에 숙정(肅正)을 하는 한편 교육제도개선 산업부흥에 착수하였으나 정부와의 충돌은 계속되었다. 이때 일로전쟁은 최절정에 달하였고 일본은 우리나라에 대하여 위협과 아첨으로 군사진출의 길을 얻을 뿐 아니라 조약을 강제로 맺게 하여 주권의 침해를 받게 되었다.

일로전쟁을 결국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미국대통령 루스벨트의 주선으로 포-쓰마스에서 강화담판이 열리게 되었다. 이 조약의 체결로 우리 한국이 할 수 없이 일본세력권내(日本勢力圈內)로 들어가게 되니 의암성사는 일체운동을 중지하고 뒤에 기회를 기다리면서 순수한 교회확장과 교육사업에 전력하던 중 한일합병의 망국(亡國)의 운(運)을 당하게 되었다.

기미독립운동
(己未獨立運動)
기미독립운동은 한일합병 이후 10년만인 포덕60년(서기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운동이다.

한일합병 이후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기까지의 우리 국민들의 동향을 개관하면 우국지사(憂國之士)는 대개 해외로 망명하여 만주 혹은 중국 기타 각지에서 무관학교 등을 설립하여 순전한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한편으로 독립군을 조직하여 내지침공(內地侵攻)을 감행하며 중국군관학교에서 훈련도 받고 또 혁명결사를 조직 일정(日政)의 폭압만행을 세계에 선전하는 등 한민족의 정기를 선양함으로써 비상활동을 계속하였으며 국내에서는 배일사상이 팽창한 분위기 속에서 패검교육(佩劍敎育)과 그 두렵고 독한 군경(軍警)의 아래에서도 배일투쟁(排日鬪爭)이 끊이지 않던 중 서기 1914년에 세계1차대전이 발발하여 민심은 더욱 흥분되고 우국지사들은 광복기회라고 수군거리게 되었다.

「천도교제3세교조」 「손의암성사」 는 기유년(己酉年) 호아자수(呼我者誰)의 강서중(降書中) 「합이성일(合二成一) 비고비금(非古非今)」의 서의(書意)에 의하여 독립운동준비를 꾸준히 계속하시면서 교회본부 안에 의사원제도(議事員制度)를 특설하여 지방교구대표 한 사람 씩을 의사원으로 선정하여 중앙에 상주훈련시키는 한편 우이동에 봉황각을 신축하고 지방두목 수 백 명을 선발하여 연성(練性을) 시켜 정신적 결합을 도모하면서 유사지시(有事之時)에 대비태세를 갖추었다.

대전(大戰)이 서기 1918년에 휴전이 되고 미국 「대통령윌슨」의 중개로 강화회의가 열리게 되었을 때 「윌슨」이 제출한 14개조 중에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는 세계의 이목을 용동(聳動)시키게 되었다.

이때 「손의암성사」는 갑진혁신운동 이래 60년 간 한일합병 이후 10년 간 념념불망하던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국권회복이 불실차기(不失此期)라고 결정하시고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의 준비로서 전교회를 통하여 105일 광복기도를 먼저 행하고 불교 기독교 두령을 통하여 3대종교(三大倧敎)의 대표자 33인이 전민족(全民族)의 이름으로 단기4252년(서기1919년) 3월1일에 조선독립선언서(朝鮮獨立宣言書)를 발포(發布)하였다.

이 독립선언이 발표되자 남녀노소할 것 없이 방방곡곡(坊坊曲曲) 진진포포(津津浦浦)에서 일시에 동조(同調)하여 일대운동(一大運動)이 일어나니 독립만세의 소리는 천지를 흔들게 되었다. 이에 창황망조(蒼黃罔措)한 일본은 군대까지 출동시켜 학살투옥 등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잔인한 폭압을 가하였다.

이외에 외지에 있는 동포도 이에 응하여 단체 혹은 개인으로 국내에 돌입하여 결사투쟁한 것이 부지기수였고 한편으로는 독립선언발포와 동시에 해외혁명지사들과 상통하여 중국상해에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비밀리에 자금조달과 인원파견(人員派遣)이 있어 기밀을 상통하여 왔다.

무인멸왜기도운동
(戊寅滅倭祈禱運動)
무인멸왜기도는 포덕77년(서기1936년) 8월14일에 춘암상사(春菴上師)의 밀령에 의해 진행하여 오던 도중 포덕79년(서기1938년) 2월17일 최택선의 밀령 누설이 신천경찰서에 제보되어 전 교회적으로 검거선풍이 일어난 것이다.

만주사변을 승리로 이끈 일제가 중국대륙과 동아전폭(東亞全幅)을 손아귀에 넣기 위하여 우리민족에게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을 강요하던 암흑기 포덕77년(서기1946년)에 「개같은 왜적놈을 하날님께 조화받아 일야간에 멸하고서 전지무궁 하여 놓고 대보단에 맹서하고 한의 원수 갚아보세」의 구국이념(救國理念)으로 천도교4세교조(天道敎4世敎祖) 춘암상사의 밀령에 의한 무인멸왜기도운동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불멸의 공헌을 남겼고 기미년 31운동에 비견할 수 있는 큰 역사적 사실이다.

이 운동은 일제의 황민정책을 송두리째 뿌리뽑았고 민멸(泯滅)하여 가는 민족의식을 소생시키는 동시에 우리 민족의 진로에 광명을 비추었다.

구미용담에서 천(天)의 계시로 인문개벽(人文開闢)의 운을 타고 발원된 천도교가 1세기동안 시천주의 새 가치관을 이 세상에 정립키 위하여 끊임없이 기성가치질서(旣成價値秩序)에 도전하여 온 것은 동학100년사(東學100年史)가 입증하고 있다.

동학은 포덕35년(서기1894년)에 민족적모순(척양척왜斥洋斥倭)과 계급적모순(제폭구민除暴救民)을 함께 극복키 위하여 혁명의 봉화를 들었으며, 포덕45년(갑진, 서기1904년)에 마관조약에서 외세의 힘으로 얻어진 대한독립이 청일로3국의 권력정치작용에서 위기에 직면하였을 때 동학은 흑관백의의 전통적 유습을 타파하고 단발흑의로 규모를 일신하여 독립의 기초를 견고히 하려고 진보회운동을 하였으며, 포덕60년(서기1919년)에 일제의 침략에서 벗어나 한일청3국이 정족의 세로 동양의 안정세력을 구축하려고 31운동을 주도하였다.

만주를 침략한 일본은 우리 한국을 병참기지로 삼아 중국대륙을 제패하려는 야심에서 우리의 민족의식을 동화와 탄압의 양면정책으로 말살시켜 우리민족이 재기불능의 경지에까지 군국주의통치를 하여왔다.

그 시기에 일반민중은 고사하고 민족의 지도자까지 일제군문에 투항 아니면 망명 또는 은둔의 길을 택하기 전에는 생을 유지할 수 없는 살벌한 시기였다. 수십만의 순도자를 내면서 갑오, 갑진, 기미 3대운동을 하여온 천도교의 정신사가 일제의 식민통치 속에서 단절되느냐 연속되느냐의 기로에 섰던 포덕77년(서기1936년) 8월14일에 춘암상사께서 “성불이심(性不離心) 불용이시(不用離時)”의 말씀을 하시면서 과거에는 스승스승님이 전통적으로 안심가(安心歌) 중 멸왜심고를 실행하여 왔지만은 이제는 시기가 성숙하였으므로 일반 두목에게 “무궁한 내 조화로 개같은 왜적놈을 일야간에 멸하고서 전지 무궁하여 놓고 대보단에 맹서하고 한(汗)의 원수까지 갚겠습니다.” 라고 조석식고에 지성껏 기도하라고 밀령을 내리신 것이다.

멸왜기도의 밀령과 병행하여 특별기도와 특별희사금모집을 했다는 사실은 포덕79년(서기1938년) 5월10일 자 매일신보 등 각 신문보도와 같이 교도를 중심으로 주권회복을 기도(企圖)하고 일지사변(日支事變) 발발(勃發)을 기회로 적극적 활동개시와 아울러 교도에게 운동자금모집 운운의 총독부 경무당국에서 발표한 기사와 같다.

이렇게 멸왜기도와 우리나라 주권획득운동이 비밀리에 진행되던 도중에 포덕79년(서기1938년) 2월17일 최택선의 비밀누설이 황해도 신천경찰서에 제보되어 황해도 연원대표 홍순의와 그 관내 전체교인에 대한 검거선풍이 일기 시작하였다. 황해도 전 교인에 대하여 2월27일까지 구속취조를 완료한 3월4일에 중앙에 최고간부 최준모(63)장노를 위시하여 금융관장 김재규(51), 봉도 한순회(54), 심계원장 김경함(52) 등 4인이 사리원으로 압송되었고 춘암상사는 노환으로 병상심문에 그쳤으나 이로 인하여 전국각지에서 다수 교인이 투옥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교인 대부분은 심한 고문을 당하였고 그 중 출감 후에 고문여독으로 환원하신 김재규(장흥), 손필규(논산), 이강우(해남), 김정삼(신천) 네 분이었다.

무인멸왜기도는 우리 천도교의 정신사에서 특기할만한 의의를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천도교의 다른 운동은 기성세력과 대치하다가 기성세력에게 유린당하고 말았지만은 무인멸왜기도를 사건취조 과정에서 사실상 인정해 놓았다. 그러나 중일전쟁 수행에 차질이 올 것을 두려워한 일제는 사건불확대 방침으로 전국각지에서 피검된 다수 교인들을 전부 석방시키고 최준모, 김재규, 한순회, 김경함, 홍순의 등 5인만 치안유지법 대정8년제영7호 위반으로 송국(送局)하였지만은 5인마저 70일만에 불기소처분으로 무죄방면이 되었다. 일제가 31운동 때보다 죄질이 크다고 하면서 무죄방면을 한 것은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한 항복이요 일제멸망의 시기가 성숙했다는 춘암상사의 말씀과 같이 그 시기에 멸왜기도(滅倭祈禱)로 패망의 요인이 배태(胚胎)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무인멸왜기도운동(戊寅滅倭祈禱運動)이 우리 천도교운동(天道敎運動)에서 정신사적의의(精神史的意義)가 크다. 그러한데 멸왜기도가 있은 지 4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일제의 탄압과 815 이후에는 정치적 악순환 속에서 이 사건의 내용이 매몰된 채 오늘에 이른 것이다. 멸왜기도 때에 모금했던 성금을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에 전달하였다.

각 군(郡) 교인들이 피검되어 심한 고문을 당한 사람의 명단은 아래와 같은데 자료모집이 완전치 않아서 전부 기재치 못 함을 밝혀둔다.

신천군 - 김성록 강제동 이형식 김자현 김재선 이준선 권의식 방택기 김정삼 김윤하 이동만 김성오 김인선 김경환 이지화 이제훈 이제원 김덕환 이노식 김학노 김이준 이용찬 이동호 김정삼은 장독사(杖毒死)

안악군 - 박승도 김운학 김환주 이만유 오영찬 이흥제 현행묵

은율군 - 홍성인 정홍석 정돈근 김준각 김찬각 홍명용 홍대의 류봉주 홍성삼 정기준 정기헌 김택봉 최형준 나종화 김의곤 황규원 김창일 박인석 홍한용 김창헌

송화군 - 손덕겸 손임수 손인겸 우동익 이정희 최정현 강용택 이진희

장연군 - 강응열 강종수 양태호 김치명 최병삼 김승하 강원보 김기환 박도근 양만훈 강흥주 강원암

재령군 - 최재학 박창우 강병억 최원이 강제칠 박능화 양한조

봉산군 - 이승환 오덕원 장명호

해주군 - 안영석 안정석 최보흠 여운남 최덕삼 안학순 안상철 윤희효 최승항 최원식 윤응칠 최영식 유종만

옹진군 - 정한영 정근영 하택용 조효준 정운화 이화세 정운채 이원세

임실군 - 최종기 김한경 박성언

남원군 - 류태홍 김종환

논산군 - 손필규

서산군 - 박병협

예산군 - 정환석

광주군 - 김정은

아산군 - 이보성 강창주 이규호 이종선

을묘통일운동
(乙卯統一運動)
‘미래로 이어지는 동학운동' 바로가기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시천주진리(侍天主眞理)에 의한 인내천주의(人乃天主義)와 사인여천윤리(事人如天倫理)의 새 질서개념(秩序槪念)으로 갈라진 남북과 분열된 세계를 통일하자는 통일선언서(統一宣言書)를 포덕116년(서기1975년) 3월10일 동아일보를 통하여 만천하에 발표하고 통일운동을 추진하였는데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

오늘을 사는 우리겨레는 그 구성원이 자기주관에만 집착됨이 없이 당면한 조국통일과 세계평화의 과업을 달성해야 할 사명을 띄고 있다. 이 사명은 자신의 존속(存續)과 조국을 위하여 도피하거나 탈출해서는 안 되는 중대한 의무이며 과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물심양론(物心兩論)의 기성가치체계(旣成價値體系)에서 파생된 양대모순체제(兩大矛盾體制)를 극복하고 양극화(兩極化)된 사상(思想)을 통일시킬 목적으로 두 사상의 공통분모인 시천주사상(侍天主思想)으로 조국통일과 세계평화운동에 매진하기로 결의한 다음 천명(天命)을 받들고 법력(法力)을 발하여 통일성업(統一聖業)에 심력을 발칠 것을 다짐하였다.

문예부흥(文藝復興) 이후 4~5백 년 동안 세계를 지배해온 서구문명(西歐文明)은 퇴조의 일로를 걷고 있으므로 서구문명의 정신적 바탕인 기성종교(旣成宗敎)와 사상적(思想的) 핵(核)인 민주주의(民主主義)는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되고 말았다. 천지가 통일되고 정위(正位)하는 데서 만물이 길러지는 것과 같이 신(神)과 인(人)이 통일되고 정위(正位)하는 데서 사상(思想)과 조국(祖國)이 통일되어 신인간(新人間) 신세계(新世界)가 창조될 것인데 대내외 정세가 이와는 상반(相反)된 현상으로 전개되므로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시대적 요청에 의하여 우리들은 통일운동(統一運動)을 추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