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 있으므로 우주가 있게 되고 우주가 있으므로 생멸(生滅)과 성쇠(盛衰)의 자취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법칙에 따라 낡은 것은 물러가고 새 것이 오는 것은 우주의 공도(公道)이며 인간사회에 있어서 유일한 진리(眞理)이다.
단기(檀紀)4193년(서기1860년) 4월 5일은 하느님이 포태(胞胎)의 수(數)를 다시 정(定)해 내어 후천천황씨(後天天皇氏)인 대신사(大神師) 최제우(崔濟愚)에게 금불문고불문(今不聞古不聞) 금물비고물비(今不比古不比)의 무극대도(無極大道)인 천도(天道)를 주신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첫 날이다.
구미용담(龜尾龍潭)에서 인문개벽(人文開闢)의 운(運)을 타고 발원된 천도교는 시천주(侍天主)의 새 가치관을 이 세상에 정립시키기 위하여 끊임 없이 기성질서(旣成秩序)에 도전해온 현대의 일대거물(一大巨物)이요 시천주사상(侍天主思想)을 바탕으로 종교통일을 선언한 바 있는 인류의 일대광명(一大光明)이다. 천도교는 어떤 사람의 구도(求道)와 각득(覺得)에서 창도된 것이 아니라 선천오만년(先天五萬年)에 노이무공(勞而無功)하신 하느님이 사지(死地)에 빠져있는 인류를 살리기 위한 하느님의 거룩한 뜻으로 하느님 스스로가 명(命)하시고 하느님 스스로가 계시(啓示)한 천도본체(天道本體)의 발현(發現)이다.
이러한 무극대도(無極大道)가 왜 우리나라에서 먼저 발현되었는가?
첫째, 「십이제국(十二諸國 다 버리고 아국운수(我國運數) 먼저하네」「하느님이 내 몸내서 아국운수(我國運數) 보전(保全)하네」「生於斯 得於斯故 以爲先東方」등 경전 여러 곳에 있는 구절로 보아서 천도교가 우리나라에서 먼저 발현된 것은 하느님 선민의식(選民意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둘째, 물질문명의 행복을 향수(享受)하는 종족이나 아주 미개한 종족은 새 세상에 대한 동경(憧憬)의 념(念)이 희박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유구한 문화와 역사를 갖은 민족으로서 기성제도(旣成制度)의 모든 악습에 고난과 압증(壓症)이 극도에 달하였으며, 세계 어느 민족도 갖지 못한 우리 민족만이 위대한 역사창조능력 을 갖고 있고 해답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 천지무궁(天地無窮)의 수(數)에 의하여 선후천(先後天)이 번복(翻覆)하는 시운(時運)의 교체기에 후천개벽운(後天開闢運)을 대신사(大神師)가 받았기 때문이다.
천도교가 출현하던 우리나라의 사회정세를 개관(槪觀)하면 윤리도덕의 쇠퇴, 정치의 부패, 탐관오리의 발호(跋扈), 귀족과 특수계급의 여러 가지 횡포와 착취 당쟁 등으로 말미암아 전민심(全民心)은 극도의 마비상태에 이르러 그 지향할 바를 모르는 중에 밖으로 물질문명의 세력이 동양에 침입하여 인심이 흉흉하고 혼란이 절정에 이르렀다. 이 때「천도교일세교조(天道敎一世敎祖)」최수운대신사(崔水雲大神師)는 6대문학대가(六代文學大家)의 후예로 이 세상에 대한 관찰을 내리시고 전인류의 구원의 길을 결심한 후 16세부터 36세까지 침사명상(沈思冥想)과 갖은 고행을 쌓았다. 그 결과 경신(庚申) 4월 5일에 천어(天語)를 친히 받아 전인류의 본원(本願)이요 새 광명인 천도(天道)의 본원(本源)을 밝힌 것이다.
「천도교제1세교조(天道敎第一世敎祖)」「최수운대신사(崔水雲大神師)」이름은 제우(濟愚)니 단기4157년(서기1824년) 10월 28일 경상북도 경주에서 탄생하시였는데 대신사(大神師)가 탄생할 때에 집 뒤 구미산(龜尾山)이 3일을 대명(大鳴)하고 서운(瑞雲)이 집안을 싸두른 영적(靈蹟)이 있는데 이것은 신인(神人)의 출세(出世)를 조짐하였던 것이다.
「대신사(大神師)」일찍이 그 때의 세태(世態)를 보시고 항언(恒言)하시되「군불군(君不君), 신불신(臣不臣), 부불부(父不父), 자불자(子不子), 부불부(夫不夫), 부불부(婦不婦)」라 하시며「요순지치(堯舜之治)와 공맹지덕(孔孟之德)으로도 부족시(不足施)」라 하시고 「유도불도(儒道佛道) 누천년에 운이 역시 다하였다.」하시며「일천하(一天下)의 번복운수(翻覆運數) 다시 개벽 아닐런가」하시었다.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 잡고 도탄의 민중을 구하며 널리 그릇된 세상을 건지고 고난속의 인류를 살리기 위한 도(道)를 얻고저 천하(天下)를 주유(周遊)하며 인심풍속을 살피기로 하였으며 또 지나간 서적을 샅샅히 연구도 하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 침사명상(沈思冥想)도 하며 고행과 수련 36년간 이 동안「대신사(大神師)」는 지나간 모든 것을 가지고는 도저히 이 세상을 건지지 못할 것을 알았다. 대신사(大神師)는「낡은 일체는 무너진다. 오직 개벽이다 개벽...」이렇게 단정을 내리고 개벽의 새 운수 새 진리를 찾기에 더욱더욱 고행과 수련을 쌓았다.
포덕(布德)1년(포덕은 천도교의 년호) 즉 단기4193년(서기1860년) 4월 5일은 드디어 하느님과의 직접문답에서 영부(靈府)와 주문(呪文)을 받으시며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이란 천어(天語)를 들으시고 개벽운수(開闢運數)를 타고 인류최후의 진리인 무극대도(無極大道) 천도(天道)를 받아 하느님의 명(命)으로 하느님의 뜻을 발현한 天道(그때에는 東學)의 이치를 밝히시니 썩고 죽은 혼을 가지고 헤매던 민중은 이 개벽혼(開闢魂) 생혼(生魂)의 일대광명(一大光明)에 눈이 뜨이고 살길을 찾아 모여드니 만고(萬古)의 신인(神人) 대신사(大神師)는 40세를 최후로 대구장태(大邱將台)에서 종용(從容)히 형(刑)에 나아가시니 때는 포덕(布德)5년(서기1864년) 3월10일이다.
제2세교조(第二世敎祖)
제1세교조(第一世敎祖) 순도 후 대도(大道)를 계승한 분이 천도교 제2세교조(第二世敎祖) 최해월신사(崔海月神師)이다.
해월신사(海月神師)의 이름은 시형(時亨)이니 포덕전(布德前)33년(단기4160년, 서기1827년) 3월 21일 경상북도 경주에서 탄생하시였고 포덕(布德)4년(서기1863년) 8월14일 도통을 계승하시다.
대신사(大神師) 순도 이후 그때 정부에서 天道敎(그때 東學)를 이단(異端)의 지목(指目)으로 탄압(彈壓)이 극심하여 천도교인이면 일가(一家)를 멸족하고 심지어는 교인이 사는 동리가 있으면 그 동리 전체에 박해를 가하였다. 이렇게 함으로 천도교인은 자연히 지하적(地下的)으로 연락을 하며 현도운동(顯道運動)을 하게 되니 이렇게 하기를 36년간이나 계속하였다. 36년간 비밀결사(秘密結社) 이것은 전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이 36년간 대도(大道)를 지도해온 분이 제2세교조(第二世敎祖) 최해월신사(崔海月神師)이다.
해월신사(海月神師)는 진성(眞誠)의 실천인이시다. 해월신사(海月神師)의 주도면밀한 통솔 아래 36년간 지하(地下) 비밀결사(秘密結社)로 내려온 천도교가 포덕(布德)33년(임진, 서기1892년)에 해월신사(海月神師)의 통유문(通喩文)에 따라 전라도 삼례에 수천 명이 모여서 대신사(大神師)에 대한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시작하였다. 이 신원운동(伸寃運動)(伸寃-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버림)이 천도교운동의 발족이며 선천(先天)의 기성질서(旣成秩序)에 대한 항거운동의 효시(嚆矢)이다.
이 신원운동(伸寃運動)을 두 가지 측면으로 해설하면 한 측면으로는 대신사(大神師)가 하느님의 명(命)을 받아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도(道)로써 덕(德)을 천하에 펴고 도탄에 빠진 창생을 구제하려다가 좌도난정(左道亂政)의 죄목(罪目)으로 참형(斬刑) 당한 것이 억울함으로 그 억울함을 펴자는 것이 그 표면적인 이유이고 다른 측면으로는 「余亦無功故 生汝世間 敎人此法」의 하느님 말씀에 의거하여 사람 각자의 정신 심층(深層)에 원한(怨恨)이 맺어져 있음으로 그 원한을 풀어서 하느님이 품부(禀賦)한 본연(本然)의 자유평등의 경지로 회복시키자는 것이 그 이면적 이유이다.
해월신사(海月神師)의 영도 아래 전라도삼례집회, 광화문외(光化門外)의 복합상소(伏閤上疏), 보은장내집회와 계급적모순(階級的矛盾-除暴救民)과 민족적모순(民族的矛盾-斥洋斥倭)을 함께 극복키 위한 동학혁명운동을 하였다. 이러므로 해월신사(海月神師)도 마침내 조정)의 지목으로 체포되어 72세를 일기(一期)로 한성감옥에서 역시 좌도난정율(左道亂政律)로 교형(絞刑)을 받으시니 포덕(布德)39년(단기4231년, 서기1898년) 6월 12일이다.
제3세교조(第三世敎祖)
제2세교조(第二世敎祖) 해월신사(海月神師)의 순도 이후 천도교(동학)에 대한 정부의 지목은 더욱 극심하였다.
이 때에 두 분 교조(敎祖)의 뒤를 계승한 분이 천도교 3세교조(三世敎祖) 손의암성사(孫義菴聖師)이시다. 의암성사(義菴聖師)의 이름은 병희(秉熙)이니 포덕(布德)2년(단기4194년, 서기1861년) 4월 8일 충청북도 청주에서 탄생하시었고 포덕(布德)38년(단기4230년, 서기1897년) 12월 24일에 도통(道通)을 계승하시다.
2세교조(二世敎祖) 수형(受刑) 이후 교도수습(敎徒收拾)과 교리천명(敎理闡明)에 총력을 기울여 동학(東學)이란 이름을 천도교로 명칭하여 천하에 광포(廣布)하고 교회를 조직하니 대신사(大神師)의 도즉천도(道則天道)라 하신 본명(本名)을 그대로 내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제도와 의절 기관을 창설하시니 명실 공히 교의 기반을 견고히 하시며 한편으로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계책을 강구한 결과 마관조약(馬關條約)에서 외세의 파동(波動)으로 얻어진 독립을 일로(日露)의 세력각축(勢力角逐) 틈바구니에서 독립의 기반을 견고히 하려던 갑진혁신운동(甲辰革新運動)을 지휘하셨으며 포덕(布德)50년(을유) 8월 14일에 호아자수(呼我者誰)의 강서(講書) 중 合二成一 非古非今 琴調失今 古家閒翁, 哀哉人生 猿頭虎尾의 글 뜻에 따라 일한합방 이후 십년동안 독립운동을 준비하시어 저 유명한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을 영도하시고 기어이 왜경에 피체(被逮) 되어 옥중에서 병을 얻어 62세를 일기(一期)로 환원(還元)하시니 포덕(布德)63년(단기4255년, 서기1922년) 5월 19일이다.
제4세교조(第四世敎祖)
제3세교조(第三世敎祖) 환원(還元) 이후 왜정의 탄압은 극심하였고 포악한 왜정 밑에서 세분 교조(敎祖)가 닦아 놓으신 견고한 기초를 조금도 어김없이 지켜온 분이 천도교4세교조(四世敎祖) 박춘암상사(朴春菴上師)이시다.
춘암상사(春菴上師)의 이름은 인호(寅浩)이니 포덕전(布德前)5년(단기4188년, 서기1855년) 2월 1일에 충청남도 덕산에서 탄생하시고 포덕(布德)49년(단기4241년, 서기1908년) 1월 18일에 도통(道通)을 계승하시었다. 춘암상사(春菴上師)는 갑진(甲辰), 기미(己未) 두 운동에 의암성사(義菴聖師)를 도와 대사(大事)를 참획(參劃)하시고 교의 모든 기관창설(機關創設)에 대훈(大勳)을 세우시며 한 편으로 교화(敎化)와 교육사업에 진력하시다.
의암성사(義菴聖師) 환원(還元) 이후에 교도(敎徒)의 수습(收拾)과 포악한 왜정 밑에서 교정운용(敎政運用)에 전력을 다 하시던 중 우리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고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을 강요한 일제말기에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분까지 일본군문(日本軍門)에 투항하였는데 춘암상사(春菴上師)는 오직 설한(雪寒)에 굽힘 없는 일지매격(一枝梅格)으로 국민정신을 지도하시고 교인을 교화하시다.
그리하여 일제멸망의 시기가 성숙한 것을 하느님의 강화(降話)로 알으신 춘암상사(春菴上師)는 우리나라에서 일제를 구축(驅逐)하고 주권을 획득하려는 계책에서 스승 스승님이 전통적으로 심심상전(心心相傳)해 온 안심가(安心哥) 중 왜적(倭賊)에 관한 문제를 포덕(布德)77년(단기4269년, 서기1936년) 8월 14일 지일기념(地日記念) 때에 상경한 경향각지 두목들에게 멸왜기도(滅倭祈禱)의 밀령(密令)을 내리셨다. 또 서양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올 것을 영감으로 알으신 춘암상사(春菴上師)는 서양사람 경계에 주의하라고 말씀하시어 우리민족의 진로를 밝히시다. 포덕(布德)81년(단기4273년, 서기1940년) 4월 3일 86세를 일기(一期)로 환원(還元)하시다.